제15회 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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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월간 GBS (글)] 4월_우수작_김가원_미래의 '박서보 예술상' 수상자에게

4월 콘텐츠 우수작

미래의 박서보 예술상수상자에게

 

14회 광주비엔날레 서포터 김가원 

 

처음 단색화를 봤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단색화 작품 앞에서 일었던 의문은 왜 우리나라 미술 경매시정에서 단색화가 상위권을 차지하는 걸까였습니다. 미술 공부를 하기에 앞서 무작정 방문했던 환기 미술관에서는 낯선감동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박서보 화백이 강조했던 수행이 가장 잘 어울리는 미술이 단색화임을 동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처음 마주했던 단색화 앞에서 일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틈틈이 미술관을 다니며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있었던 때에 광주비엔날레에서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을 제정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관심있는 작가의 예술상 제정은 서포터즈인 저에게 의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 예술가들에게도 박서보 화백의 ‘attitude’가 예술을 이해하고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지난 2월 광주비엔날레가 제정한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은 기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대상에게 시상했던 광주비엔날레 눈(noon) 예술상을 새롭게 개편한 상입니다. 박서보 화백은 새로운 예술가 양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비영리 재단법인 기지(GIZI)’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기지재단은 새로운 창작활동, 비주류,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사업 중 하나로 최근에는 광주비엔날레에 100만 달러를 후원, 새로운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후원금은 2023년 제14회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42년까지 매 대회마다 선정된 작가에게 상금으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박서보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며 미술계에 발을 딛었습니다. 입학한 해에 한국전쟁을 겪으며 동양화교수의 부재로 서양화로 전공을 바꾸고 이종우 작가와 김환기 작가 밑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전쟁 중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그는 미군부대가 버린 레이션(전투식량) 박스에 시멘트 포대종이를 덧대어 아스팔트 콜타르를 발라 만든 캔버스에 열정을 그려냈습니다. 졸업 이후 역시 활발하고 거침없는 활동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결과 1957<회화 No.1>으로 한국 최초 엥포르멜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유네스코에서 주최한 세계청년작가파리대회 합동전에서 한국대표로 출전해 <원죄>라는 작품으로 1위를 차지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작가들과의 교류를 국가적으로도 할 수 있도록 자국에 와서 다양한 의견을 내는가하면 자신이 공부한 홍익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며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파격적인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과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충돌해 결국 사직하고 다시 작가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박서보 화백은 도전과 극복, 도전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특히 박서보 화백의 대표작 묘법연작은 작업의 과정이 수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들이 서툰 한글을 연습하기 위해 끄적이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체념하고 포기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연작은 무목적성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나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 과정자체가 특이점을 갖게 됩니다. 닥종이로만 만든 한지의 일체성은 온전히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완벽한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2009년까지 하루에 14시간을 작품 제작에 사용하였습니다. 이제는 건강악화로 작업 시간을 줄였지만 여전히 그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서보 화백을 알아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믿고 거침없이 도전하고 나아가려는 모습이 아흔이 넘은 나이지만 예술을 이야기할 때 순수한 화백의 표정은 과제 몇 개에 힘들어하던 저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누구도 닮지 말고 자신의 예술을 만들라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파인 아트 패러다임 속에서 획일화된 교육을 받고 있는 주변 미대생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서보 화백을 통해 그림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해보았습니다. 보이는 것 역시 결국 내면의 나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서보에게 그의 작품은 수신(修身)하는 도구이자 수행과정의 찌꺼기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수신과정을 밟고 있나요? 여러분의 찌꺼기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질문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뇌와 행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 찌꺼기에서 작품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시대의 모든 수행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